국내와 해외의 디지털 유산 상속 법 비교 분석
디지털 유산 상속, 왜 새로운 법적 영역이 되었는가
디지털 자산은 더 이상 단순한 파일이나 데이터가 아닙니다. 이메일, 클라우드 문서, 유튜브 채널, SNS 계정, 암호화폐, 온라인 지갑 등 모든 디지털 흔적은 정보뿐 아니라 자산의 형태로 가치가 확장되고 있는데요. 특히 이들 자산은 사망 이후에도 삭제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플랫폼 상에 그대로 남기 때문에 법적으로 누가 관리하고 소유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전통적인 상속법은 부동산, 예금, 유체동산 등 물리적 자산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디지털 자산처럼 비물질적이고 플랫폼 의존적인 재산의 상속 여부와 절차는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거나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에 따라 각국은 디지털 유산에 대한 입법 정비를 진행하거나 기존 민법 해석을 확장해 적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한국, 미국, 유럽연합(EU)은 모두 디지털 자산의 상속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각기 다른 법률 시스템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상속인 보호, 프라이버시, 플랫폼 정책 간의 균형점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세 지역의 디지털 자산 상속 관련 법률·제도·운영 현실을 비교해보겠습니다.
한국: 전통 민법 해석 중심, 실무는 공백에 가까운 수준
한국의 디지털 유산 상속은 여전히 전통적인 민법 체계 내 해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민법 제1005조에 따라 피상속인의 사망과 동시에 상속이 개시되며 일체의 재산적 권리는 법정 상속인에게 승계됩니다. 이 조항은 디지털 자산에도 원칙적으로 적용되지만 문제는 현실적인 접근권과 처리 절차, 플랫폼 협조가 불명확하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네이버, 카카오, 구글, 애플 계정은 법적으로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해당 플랫폼의 약관은 대부분 "계정은 개인 전용이며 타인에게 양도 또는 상속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족은 사망진단서, 가족관계증명서, 유언장 등을 갖추고 각 플랫폼의 고객센터나 법무 부서에 접근을 요청하지만 사실상 접근이 제한되거나 부분적인 데이터만 전달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암호화폐의 경우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기타재산으로 분류되며 사망일 기준 시세를 기준으로 과세됩니다. 그러나 지갑 주소나 개인키를 모르면 실질적인 상속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한국에서는 상속 법률상으로는 인정되지만 기술적·실무적·제도적 장치는 아직 미비한 상태이며 가족이나 유족이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을 온전히 이어받는 데 큰 장벽이 존재합니다.
미국: 입법적 대응 시작, 주(州) 단위의 디지털 유산법 제정 확산
미국은 한국과 달리 디지털 자산 상속을 위한 별도의 입법 대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가입니다. 특히 2015년 미국 변호사협회가 제안한 RUFADAA (Revised Uniform Fiduciary Access to Digital Assets Act, 디지털 자산 접근권에 관한 통일법)은 현재 기준으로 45개 주 이상이 채택하거나 유사한 법안을 제정한 상태입니다.
이 법의 핵심은 신탁 관리자, 유언 집행자, 법원 지정 대리인 등에게 고인의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고인의 동의가 담긴 유언장 또는 생전 위임장, 또는 서비스별 사후 계정 설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RUFADAA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와 상속인의 합법적인 접근권을 균형 있게 설계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구글,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사망자 계정 처리 가이드를 명문화하고 있으며 ‘Inactive Account Manager(구글)’, ‘Legacy Contact(애플)’ 같은 사전 설정 기능을 통해 유족이 일부 데이터를 열람하거나 계정을 삭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계정 제공자의 정책과 주정부의 법률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보다 진일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EU): GDPR 체계하의 개인정보 보호와 상속권 간 충돌
유럽연합은 디지털 상속 문제에 대해 가장 예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그 중심에는 2018년부터 시행된 DPR(일반 개인정보 보호 규정)이 있는데요. GDPR은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행위’를 엄격히 제한하며 사망자의 개인정보 처리 여부도 각국의 법률에 따라 해석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EU 국가들 사이에서도 사망자 계정 처리에 대한 법적 판단이 다르게 적용됩니다. 예컨대 독일 연방법원은 2018년 “페이스북 계정도 일반 유산처럼 상속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에 따른 실무 적용은 아직 일관되지 않습니다.
또한 GDPR은 데이터 최소 수집, 데이터 접근 제한, 프로파일링 제한을 강조하는 만큼 사망자의 디지털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프라이버시 보호와 상속권 보호가 충돌하는 민감한 사안으로 분류됩니다. 이로 인해 유족은 사망자의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서비스 제공자는 프라이버시 보호 의무를 근거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EU는 지금까지 디지털 상속에 대해 EU 차원의 통일 입법은 마련하지 않고 각국 사법부의 해석과 민법 적용, 플랫폼 자체 정책에 맡기고 있습니다. 이는 GDPR 체계의 본질적 딜레마이며 향후 사망자 데이터 권리에 대한 EU 차원의 별도 규범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디지털 유산 상속법과 플랫폼 정책 사이, 글로벌 공통의 법적 과제가 남아 있다
결론은 한국, 미국, EU 모두 디지털 자산의 상속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지만 상속인의 권리, 정보 주체의 프라이버시, 플랫폼의 정책이 서로 충돌하면서 법제도적으로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영역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디지털 계정은 전통 자산과 달리 계정 소유권은 기업에 있고 사용권만 개인에게 있다는 점에서 상속권을 바로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디지털 자산의 상속은 단순한 재산의 문제가 아닌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과 인격적 권리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은 향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서비스 약관의 상속 불가 조항에 대한 합리적 조정
- 사망자 계정 접근에 대한 국가 차원의 명확한 법률 마련
- 디지털 유언장, 사후 설정 기능의 제도화
- 상속인의 접근권과 고인의 프라이버시 간 균형 원칙 정립
디지털 상속은 정보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대의 상속 개념이며 이는 법률, 기술, 윤리, 가족의 역할까지 포괄하는 복합적 과제입니다. 따라서 각국은 기술 발전에 맞는 법제도를 조속히 마련하고 개인은 생전에 디지털 유산을 미리 정리함으로써 남은 이들이 혼란 없이 그 가치를 이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